
거울은 아무래도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욱 친근한 생활 도구이다.
그 유래가 화장을 돕기 위한 도구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수면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본 것이
그 기원 이었다는 거울은 금속기 시대의 도래와 함께 청동과 구리의 한 면를 곱게 연마하여
광을 낸 거울이 생겨났고 오늘과 같은 유리 거울이 사용된 것은 12-3세기 이탈리아에서 부터
시작되어 16세기쯤 유럽 전역에 대중화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도 조선 중기 이후 사용되었는데 주로 양반이나 부유층에서 사용 되었다고 한다.
천민은 거울 볼 일이 거의 없었고 굳이 보아야 한다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정도였는데
어쩌면 자기 모습 속에서 스스로의 처지를 확인하는 것이 서글플 수도 있었을 고단한 그들에게
거울이 구태여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치스러운 도구 였을지도 모른다.
유리거울은 평평한 유리에 수은을 바르고 증발을 막기 위해 주황색 칠을 했는데 삶을 비관한
여성들이 거울 뒷면에 있는 수은을 갉아 먹고 자살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분에서 거울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일상의 중요한 도구였음이
확실하고 자신을 가꾸고자 하는 본능은 동서고금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거울은
인류에게 있어 가장 오랜 친구이자, 자아 실현 욕구 본능을 증언하는 결정적 物證이 되는셈이다.
거울 앞에 서서 모처럼 나의 모습을 물끄럼히 들여다 보았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오늘은 스스로에게 자신의 眞面目을 알려 주기 위해서...
현재의 내 모습에 우쭐해 하지 않고, '자기 도취'에 빠지지 않은 것을 보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우스型은 아닌 것이 분명하고 또한 감사한 일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위에 나를 닮은 낯익은 모습이 오버랩 된다.
올해 내 자식이 30년 전, 졸업한 모교 신학 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 녀석과 나를 비교해 본다거나,
경쟁의식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왠지 목사로서의 나의 모습이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다.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 할텐데 30년 전 召天하신 선친께서 나의 교과서가 되셨던 것 같이
자식에게 이 애비가 롤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얼마 남지 않은 목회를 제대로 해보라고 하나님께서 깐깐한 감시자를 붙여 주신 것 같아
혼자 피식 웃어 본다. 에구~ 영원한 웬수 ~~
백설공주에 나오는 계모처럼 오늘은 마음 먹고 '요술 거울'에게 한 번 물어 볼까?
거울아, 거울아, 네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본받고 싶은 멋진 목사는 누구이니?
그것이 '나'라는 대답을 감히 들을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후회가 없다.
그러고 보니 내 나이 어느덧 쉬흔 셋.
30년 전, 천국 가신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내 아버지 장 원근 목사님의 나이가 벌써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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